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달라 이사금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 [[일성 이사금]]의 추정 생년을 감안하면 아달라 이사금 본인도 군주가 됐을 때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즉위 이전의 행적은 기록에 남은 것이 없다.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제6대 [[지마 이사금]] 때는 상당히 좋았고, 제7대 [[일성 이사금]] 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아달라 이사금 시기에는 백제와 다시 사이가 나빠졌는데 발단은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吉宣)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들켜버리자 백제로 도망가버린 사건때문이었다. 아달라 이사금은 신라의 [[범죄자]]니까 돌려보내라고 백제 왕한테 송환 요구를 했다. 그런데 백제가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길선에 대한 송환 요구를 거부했다. 아달라 이사금은 화가 나 즉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갔는데 백제는 [[우주방어]]로 일관했고, 일단 신라군은 군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167년 7월 백제가 신라의 서쪽 2개 성을 공격하자 8월에 무려 28,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앞서 파견한 [[흥선]]의 20,000명의 병력과 아달라 이사금 자신이 직접 이끈 [[기병]] 8,000명이었다고 하는데 [[고고학]]으로 파악되는 초기 신라의 국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대군이라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깎아먹는 부분 중 하나이다.], 당시 백제로서도 상당히 위협적인 군세였기에 결국 잡아간 신라 [[백성]]들을 돌려주면서 화친했다. 그러나 170년 백제는 다시 신라를 침략했는데 소소한 [[노략질]] 수준이었고, 백제가 쳐들어오기 직전에 [[서라벌]]에 [[지진]] + [[서리(날씨)|서리]] + [[우박]] 3단 [[콤보]]가 와서 어수선했기 때문에 그런지 이번에는 변변한 반격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156년(재위 3년) 계립령(鷄立嶺)[* [[문경새재]] 동쪽 길, 지금의 하늘재로 추정된다.]을 열었다는 기록과 158년(재위 5년)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달라 이사금 재위 당시 신라의 영역은 [[낙동강]] 서쪽 일부를 제외하면 지금의 [[경상북도]] 대부분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두 고개를 개척한 것은, 소백산맥이 험해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충청 등 바깥 지역까지 언제든지 진출이 가능해졌고 [[금강]], [[남한강]]을 통한 교역도 가능해졌다는 의미가 있다. 기년 수정을 좀 염두에 둔다 치면, 실제로 [[대전광역시]] 월평동 유적에서 비교적 이른 4세기 중후반의 신라 토기가 출토된 것도 그런 사정을 방증한다. 173년(재위 20년)에는 [[일본]]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ひみこ,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과 간극이 70여 년인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위나라]] 명제 [[조예]]에게 [[조공]]한 히미코의 기록이 둘 다 연대가 정확하다면 신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히미코는 막 즉위한 어린 여왕이었고, [[중국]] 삼국시대에는 [[할머니]] 여왕이었을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과거의 짧은 수명, 고고학적 교차검증의 부재 등으로 보아 그랬을 개연성은 상당히 낮다. 오히려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이 60년 정도 차이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의 기년이 한 갑자(60년) 정도 소급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천재지변]] 기록도 선대 왕들 때처럼 여전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일식]], [[기근]], [[황사|흙비]] 등등. 아달라 이사금은 [[키(신체)|키]]가 7척이며 코가 매우 커 외모가 특별하였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8&totalCount=8&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02r_0020_0010&position=-1|#]] [[거인증|말단비대증]]? 이외에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도 아달라 이사금때의 일이다. 그 외에, [[벌휴 이사금]](제9대)의 [[차남]] [[석이매]]의 아들 [[내해 이사금]](제10대)의 어머니가 '내례부인'으로 적혀 있는데 이 부분이 주목할만하다. 이 내례부인이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과 동일 인물이라면 [[막장]]이 된다. 내해의 어머니로 나오는 내례부인에 대해 별도의 설명이 하나도 없고, 벌휴 이사금의 맏손자인 [[조분 이사금]](제11대)이 아닌 차남의 아들 내해 이사금이 먼저 즉위하는 정황을 봐서는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례부인은 [[지마 이사금]](제6대)의 딸로 아달라 이사금의 [[조카]]가 된다. 이전과 이후의 사례를 비추어보면 지마 이사금의 사위라는 것이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내례부인과 아달라 이사금 사이에 금이 갔고, 내례부인이 석씨 일가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벌휴 이사금 사후, 석조분이 나이가 어려 내해 이사금이 즉위했는데 대략 15~20세였을 것이라 추정이 가능하고, 그렇다면 내해 이사금이 태어난 것은 아달라 이사금 말기가 된다. 만약 내례부인이 [[간통]]을 해 태어난 아이가 내해 이사금이라면 석이매는 큰 벌을 받았을 것이고, 이후 왕비와 벌휴 이사금은 힘을 합쳐 아달라 이사금을 제거하고 즉위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벌휴 이사금보다 석이매가 먼저 사망한 것도 이를 방증할 수 있다. 물론 그냥 아달라 이사금 사후 재혼했을 가능성도 있다. 재혼한 직후 내해 이사금이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즉위시의 나이는 12세. 다만, 신라시대에 비슷한 이름이나 같은 이름의 여성들이 많아 단순한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조-에는 그에게 아들이 없었다고 했는데, 수백년 뒤 다시 등장한 박씨 왕인 [[신덕왕]](제53대)은 아달라 이사금의 [[자손]]이라고 쓰여 있어 모순이다.[* 《[[밀양 박씨]] [[http://www.cookmart.com/juksan/images/%EC%A1%B1%EB%B3%B41-%EB%B0%95%ED%98%81%EA%B1%B0%EC%84%B8.jpg|세보]]》에 따르면, 아달라 - 벽방(碧芳) - 무영(武英) - 판득(判得) - 광흠(光欽) - 미일(美一) - 내물(乃物) - 상건(相建) - 인엽(仁燁) - 계보(啓輔) - 명신(明信) - 정환(貞環) - 노겸(露兼) - 남선(楠善) - 금산(金山) - 응찬(應燦) - 덕흥(德興) - 대녕(大寧) - 이순(尼淳) - 융검(隆劒) - 지곤(之坤) - 성순(成順) - 2남 예겸(乂兼) - 신덕왕 경휘로 계보가 이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24세손이 된다. 그러나 박아달라와 박예겸 사이의 인물들 21명 모두 역사서에 행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으므로, 오직 《족보》에만 나오는 이 가계는 후대에 창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신덕왕은 '''모계'''가 아달라 이사금 계통이라 부계를 아달라의 후손으로 설정한 것은 모두 오류이다.] 《삼국사기》라는 같은 책 안에서도 초반과 후반의 말이 다르다. 이렇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면 먼저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었던 것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과거에 서자는 일반적인 아들로 안 쳐주는 경우가 많았고[* [[태종 무열왕]](제29대)에게는 7명의 적자와 3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당나라에게 보낸 국서에는 자신에게 7명의 아들이 있다고 기재했다.] 특히 신라는 [[적녀]]는 물론 [[사위]]보다도 [[서자]]가 계승권이 낮은 경우가 꽤 보이기에 더 그렇다. 아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아들이, 딸이라도 있었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했을 텐데 석이매가 내례부인을 취했다면 그 사이에 자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조선 시대라면 별 무리 없이 왕이 되었을 [[효공왕]](제52대)마저도 서자라는 핸디캡 탓에 때문에 일단은 [[진성여왕]](제51대)에게 왕위를 내준 다음 진성여왕이 죽은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신덕왕의 조상이 정말로 아달라 이사금의 서자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없다곤 할 수 없다. 물론, 신덕왕이 신라 하대의 어느 귀족이었을 뿐인데 [[정통성]]을 위해 자신이 아달라 이사금의 자손이라 주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한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신덕왕이 원래 김씨인데 이후 즉위하는 고려 [[왕실]]이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박씨로 바꿨다는 설을 주장한 바 있으나 이는 지금봐선 아예 개연성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낭설이다. 훗날 부활한 신라 박씨 왕실을 가장 많이 탄압하고 큰 피해를 주며 미워한 건 후백제의 [[견훤]]과 그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김씨 족단 일부 반란 세력이었고, 이들과 정반대 입장에서 대립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이 박씨 왕실 때 처음으로 정식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구태여 그가 신덕왕계를 박씨로 격하해서 얻을 이익은 전혀 없었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이자 효공왕의 매제로서 왕위를 승계한 것인데, 딱히 신라 왕실 전통의 계승 원칙을 위배한 건 아니지만 오랜 김씨 계승을 끊고 즉위했으므로 가급적 그나마 가장 가까운 박씨 임금 혈통을 자처하는 것이 이득이었을 개연성은 있다. 신덕왕은 죽은 뒤 [[경주시|경주]] 시가지 남쪽의 [[배동 삼릉]]에 묻혔는데 원래 아달라 이사금 한 사람만 묻혀있던 [[무덤]]이었지만 수백년 뒤 [[부활]]한 박씨 왕의 후손들이 죽은 뒤 아달라 이사금의 바로 옆에 묻혀서 삼릉(三陵)이 됐고, 나머지 하나인 [[경애왕릉]]도 근처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